[레가토플래닛 #2] 레가토플래닛 이야기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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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식회사레가 작성일2024.04.09 조회수 156본문
#1. 쌩뚱맞게 작가가 된 과정
디자인 업무 경력으로 마케팅팀에 입사했지만 글쓰기랑은 관련없던 내가 뜬금없이 작가로 활동하게 되다니.
이런 아이러니를 왠지 썰(이야기)로 풀어야만 할 것 같고, 또 지루할까 봐 걱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19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본문과 관계없음.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과거 소아 감염병에 감염되면 완치가 된다해도 후유증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후유증으로 난청(말, 소리를 듣는 데 어려움이 있는 증상)에 걸린 케이스였던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유년기는 언어치료를 받으며 그럭저럭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어발달의 황금기를 이미 놓쳤기 때문인지 어눌한 발음만큼은 그대로 남아있고 농아인(聾啞人)이면서도 수어라는 언어로 소통하는 구화인(口話人)으로 살았다.
그러나 2019년 말 찾아온 전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19 영향으로 어딜 가든 마스크는 필수가 되어 더이상 독순술(입모양을 읽는 것)로는 소통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환경이 만든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와 더 많은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인공와우 이식'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을 해도 어려운 '인공와우'는 보통은 청신경이 있어 일부러 자극을 주지 않아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반면, 청신경이 이미 손상됐을 경우 인공 달팽이관을 삽입하여 청각 자극이 필요할때 전기적 신호를 보내 이를 소리로 인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장치로 인해 수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양쪽 귀 청력을 모두 잃은 상태로 태어난 9개월 아기는 인공와우 이식 수술로 청력을 되찾았다. (이미지 출처 : 영국 메트로 신문)
아이템을 장착해도 '네이티브'는 못 따라간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해외 뉴스 기사를 보았다.
인공와우 수술 후 태어나 처음 엄마 목소리를 들은 청각장애 아기의 반응을 다룬 기사였다.
기사에 첨부된 영상 속 아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엄마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감동적인 장면이지만 뼛 속까지 T인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을텐데, 벌써 소리의 방향을 구분할 줄 알다니.. 천잰데?'
왜냐하면 사실 일 평생 소리를 듣지 못하던 사람이 기계를 통해 새로운 소리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소리를 이해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한 번도 헬스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PT수업 1회 만에 모든 운동기구 사용법과 올바른 자세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달라도 수십 회는 받아야 독립(헬스 트레이너의 도움 없이 혼자 운동하는 것)할 수 있듯이 인공와우 역시 소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완전한 대화가 가능하기까지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는 수 차례의 재활 과정이 필요했다.
주로 일상 생활에서 소리를 자주 들어야 하는데, 당시 이전 직장에서 내가 맡았던 디자인 업무는 많은 소통을 요구했으나 대부분 필담(글로 써서 묻고 대답하는 것)해 주거나 혹은 메신저로 소통했다. 즉,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자 해도 이전의 편한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재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더욱 바빠지곤 했다. 면허는 한참 전에 땄지만 빵 소리도 못 들어서 사고 낼 까봐 불안감에 운전대를 잡지 못해 장롱에 놔두고 살아오던 지난 날을 청산하고자 하는 보상 심리로 무작정 차를 사고 처음 면허 딸 때보다 더 많은 연수를 받았다. 또, 이색 원데이 클래스를 받으러 다니면서 새로운 걸 배우고 잘 들리진 못해도 사람들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뒤늦게 사회성을 배웠다. 특히, 애견 수제간식을 만들다보니 재밌어서 더 배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퇴사하고 자격증까지 땄다.
그만큼 소통에 진심이었지만 미처 생각 못한 당연한 위기에 직면하고야 말았다.
면접 첫 날, 지원 회사의 첫 인상- 실제와는 차이가 큼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화합'을 중시하는 회사에 지원하기
이윤을 창출하려면 투자가 필요한 법.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듯 도전을 하려고 해도 돈(자본)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고 취업 시장만큼 매서운 한파가 불어 닥치던 11월 말, 희한한 구인 공고를 보게 되었다. 공고는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맨 마지막이 의미심장했다.
화합을 중시한다고 써져 있었는데, 좋게 말하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열린 소통을 중요시하는 조직'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족같은 회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알아보니 다행히 내가 샀던 제품도 만들었던 안정적인 곳이었다. 이력서를 넣은 지 얼마 후, 연락이 왔다. 그동안 수 없이 이력서를 보내도 통화를 못 받아서 놓친 경우가 많아서 오랜만의 면접제의 문자에 답장하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대망의 면접 당일,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내부는 나뭇잎 캐노피와 나무 조화로 둘러 싸여 묘하게 휴양지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복지에 돈을 아끼지 않는 회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면접도 무난하게 본 것 같다. 하지만 끝내고 가려던 참에 초면인 대표님한테 갑자기 붙잡혔다.
대뜸 최근 사회 공헌 활동과 만든 제품들에 대해 거의 발표하듯이 지원자에게 말하는 걸 보며 한참 동안 생각했던 것 같다. '화합'을 중시하는 회사에 제대로 지원한 것 같다고.
그리고 앞으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본문과는 관계 없는 작가 관련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눈 떠보니 갑자기 '작가'가 되었다
시작은 분명 단순한 업무였던 것 같은데, 각자의 달란트 찾기에 푹 빠진 회사 덕분에 어쩌다 '기획자'가 되기도 하고 기획을 하다 보니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는 이유로 갑자기 '작가'가 되어 버렸다.
불과 4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스스로 써본 적은 없던 나에게 글쓰기란 그저 보고서 같은 느낌이었고, 게다가 보고서 조차 제대로 쓸 줄 몰랐다. 혹시나 해서 '제가 정말 글을 써도 되나요?'라고 재차 물어봤더니 오히려 사람이 진심을 다하면 안 되는 게 없다며 오로지 진심을 다 해보라고 월급까지 주며 응원해 주었다.
그래서 글을 써 보기로 결심했다. 말하는 게 어눌하고 서툴지라도 일단 자신감을 갖고 아무 말이나 내 뱉듯이, 글 쓰는 것도 일단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을 토대로 아무 글이나 써 보기로.